신입 기획자로 전향하고나서 입사한 곳은 취업정보를 나누는 카페로 시작해 자체 콘텐츠를 만들어 대학들과 방학기간 중 대기업 취업을 위한 강의 계약도 하고 B2C 교육 콘텐츠 사이트까지 갖춘 회사였다. 맡은 업무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모바일 App 기획이었는데 한창 재미있게 일하던 중 교통사고가 나버려 팔을 다치는 바람에 3개월만에 퇴직을 당했다.
1년이라는 시간 뒤에 다시 취업한 곳은 ERP솔루션 회사였다. 나름 회사도 크고 자체 솔루션이 있다보니 그곳에서 많은 IT지식과 계약 단위로 움직이는 B2B 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주로 맡은 업무는 전략 기획과 신규 서비스 기획. 하지만 대표님이 더 큰 솔루션 회사의 지분을 높여 인수합병을 위해 고군분투 하시다보니 점점 서비스 기획에서 전략 기획으로, 전략 기획에서 마케터가 하는 업무를 지시하는 것을 보고 자존심에 사업 방향과 서비스 기획 필요성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지만 보여주기식 홍보와 소극적인 예산 편성을 강행하다가 급기야 팩스로 공문을 돌리라는 말을 듣고나서 결국 2년만에 퇴사를 했다.(팩스 번호 무단 수집도 모자라 자사 솔루션의 홍보물을 무단으로 배포하라니.. 말이 되는가??)
솔루션 회사에서는 신규 서비스 기획을 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신중을 기해 선택한 회사는 서울 신사동 소재의 헬스케어 회사였다. 나름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회사였고 직원도 100명이 넘도록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헬스케어 관련 서비스 기획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걸을때마다 리워드를 주는 App부터 B2C 서비스 구축과 고도화 프로젝트을 기획했고, 운영 업무까지 배울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5년차 무렵의 내 기획자 커리어였다.
슬슬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획을 하고는 있지만 좀 더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경험해보고 싶었고, R&R이 명확하면서 체계적인 협업을 통해 다른 기획자들은 어떤 스타일로 기획을 진행하는지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기획자들 중에서 나의 기획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보고싶었다. 그렇게 입사한 곳은 신사동 소재 에이전시.
에이전시에 오니 역시나 주변에서 힘들다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정은 정해져있지만, 시시각각 바뀌는 담당자의 마음, 윗 선으로 보고가 갔다하면 이상한 아이디어가 더 붙어서 뒷 단까지 뒤집히기 일쑤였고 그럼에도 해야했다. 일정 또한 항상 빠듯했고 야근이 따라왔다. 설계를 하기위해 asis 파악이든, 신규 구축을 하기위한 서비스 파악, 벤치 분석 등 빠른 적응이 필수였다.
그치만 파견을 나가고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면서 파견지로의 출근길, 각 대기업 회사들의 맛있는 급식, 프로젝트 TF들과의 수다 등등 재미있는 추억들이 많았고 점심도 못먹은 채, 일하고보니 저녁 8시였던 적이 있고 차가 없던 올림픽대로를 달리며 새벽하늘을 보던 밤 등 힘든만큼 소소한 낭만이 있었다. 프로젝트 종료와 함께 철수날이면 교도소 출소(?)한 것처럼 정말 상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보험회사의 프로젝트를 하기위해 파견을 나갔고, 하루종일 요건 파악과 서비스 분석을 하느라 바쁘던 중, 요건 협의를 하기위해 현업과 회의를 진행했다. 화면 설계를 위해 상세 요건을 듣는데 현업 담당자가 개발 지식이 없다보니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었다. 자동 세팅, 자동 계산 등 모든 것의 자동화를 원하였고 리뉴얼 프로젝트였음에도 고도화급의 데이터 추가 등 여러 이슈가 있었기에 가만히 듣다가 자동화의 위험성과 더 나은 안의 검토와 개발검토 동시 진행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자리로 돌아와 곧바로 내부 회의를 진행했는데 당시 기획 PL분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개발자들이 알아서 기획서를 보고 하라고하지, 왜 우리 요건 확정되지못하게 브레이크를 거나요?
한대 맞은 느낌이었다. 목말라서 물을 마시고있는데 왜 목이 마른데 물을 마시냐는 질문급으로 당황스러웠다. 프로젝트 진행 시, 기획이 일정에 민감한 것은 알고 있다. 그치만 개발검토 결과를 받고 방향을 잡고나서 설계를 하고자했는데 왜 개발 검토 필요성을 언급하여 요건을 확정시키고 바로 화면기획서를 치지 못하게 하느냐니..?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파악이 되지않아 정신이 아득해져있을 무렵, 잠시 옆을 보았다. 다른 파트의 기획서를 치고있는 기획자들도 현업이 그저 말하는대로 받은 요건에 대해 화면설계서를 열심히 치고 있었다. 그들은 '개발자들이 개발 검토 후에 변경이 된다면, 그 때 화면설계서를 변경하면 된다'는 마인드였다. 그리고 기획 PL분은 '기획팀은 일정대로 달릴테니 이슈가 있을 때 바로 말하지않으면 일정에 대해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 개발팀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면피성 스탠스였던 것.
혹자는 내 생각을 듣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니 왜 개발자가 할 고민을 기획자가 해?
화면설계만 최종짓는 것이 목표고, 기획 롤에 충실하기위해 디자인이나 개발에 대해 월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기획자는 프로젝트 제안부터 구축설계, 오픈까지 일정 관리를 담당하는 것 아닌가? 그저 정리되지않은 요건을 명확히 하기위해 개발검토를 할 필요는 없다. 그치만 잘못된 요건에 대해 '알고있는 기획자라면' 다듬고 자르고 정제하기위한 선개발검토 필요 언급조차 기획자의 월권 행사인가?라고 되묻고싶다. 뒷단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능에 대해 개발검토 후, 축소를 할지 변경을 할지 진행할지 일부만 가져갈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라니 과거의 자부심이 산산조각이 났다. 이런 식의 기획은 그저 일정관리 전문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놀랍게도 이들은 '디자이너' 출신 기획자들이었다.('놀랍게도' 라는 표현을 썼지만 '디자이너 출신의 기획자'가 놀랍다는 것이 아니라 기획자 중에 디자이너 출신이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기에 놀랐다.) 그렇기에 개발검토 사항보다는 기획서 상의 가이드 및 디스크립션의 문구 하나마저 맞추고 Define짓는 것이 더 중요하고 친숙했던 것.

갑자기 고민이 많아졌다. 내가 기획자를 하는 이유와 기획자의 롤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 혹시 내가 기획자의 롤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던 건가? 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획자는 화면기획서와 일정 관리하는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개발자에게 이슈업을 했고 곧 개발자들은 회의를 요청했다. 한창 일하던 같은 파트의 기획자들은 이슈업 내용을 듣고는 기획서 작성 업무가 홀딩되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대기했다. 결과는 화면설계서 전면 수정(너무나도 당연히) 및 개발 방향 Fix. 그리고 기획팀에서 미운오리새끼가 되고 말았다.
기획자는 프로젝트를 더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존재한다. 당장 기획자가 있는 앱과 없는 앱의 UX부터 서비스 구성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분석과 설계, 일정관리에 대해 기획자만이 '훌륭하게' 할 수 있고 '전문가'다. 하지만 일정을 어떻게든 빨리 빼기위해 아니, 프로젝트의 실패 책임에 대한 리스크를 없애기 위해 여우처럼 구는 것이 당연한 직업이라니? 왜 그토록 기획자들은 스트레스를 안고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기위해 노력해야하는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과 이상을 가지며 오르다가 현실이라는 큰 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내가 가는 길이 '일정관리 전문가'라는 한심한 생각이 들어 담배를 피고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에게 해주었던 한마디가 뇌리를 스쳤다.
안늦었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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